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북튜버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이
『이미 뜨거운 것들』 (실천문학사 2013년 3월) 이후 6년 만에 펴낸 시집입니다.
시인이 직접 출판사 등록을 하고 손수 펴낸 시집이라 더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죽음의 부정







도무지 깨지 않는 몸을 깨워보는 손쉬운 방편으로 찬 커피를 마셔본다 체력이든 체질이든 갈수록 저질이 된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죽음의 면전에 간 몸은 얼마나 무거우려나를 생각하면 절망스럽다

신간 리스트를 스크롤 하다가 제목만 딱 보고 '어머 이건 사야 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관함 버튼을 클릭했던 책

책을 둘러싼 책쟁이들의 호들갑 아닌 호들갑들이 여기저기에서 읽혀진다. 초판본 정가의 4배 가격을 주고 2년여의 노력끝에 손에 넣었다는 담당 편집자의 일화부터 로쟈 선생의 책소개말까지

그런 부가적인 일화들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사 보게 될 책이었다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 무려 12년 만의 복간에다 믿음직스런 역자의 재번역이라니 두 말 하면 잔소리

어쩌면 제목에 기대어 짐작한 그런 책이 아닐수도 있겠지. 모든 책과 그 책에 대한 기대가 일치하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읽다가 집어치울지 꾸역꾸역 이해도 못하면서 읽을진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첨부할 뭔가는 있겠지
죽음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은 짐작과 추측일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의 좁은 영역에 갇히지 않아도 된다. 죽음을 말랑하게 낭만적 선택으로 여기든 소독 냄새 가득한 병원에서의 최후로 상정하든 각자 개인에게 닥치는 현상을 넘볼수 없으므로 뭐가 됐든 상관 없다. 죽음에 대해 무지하든 박식하든 죽음을 목전에 두게된 인간의 자세는 다를까. 죽음 관련 책을 섭렵한다고 현상 자체는 바뀔게 없고 죽음이 '아직은' 의 거리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 관심 현상을 가능케 할 수도 있지. 객관적 거리 두기가 가능하고 사진 찍기에서의 피사체가 넘어올 수 없는 절대적 차원이 보장 되고 있다는 안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내것인것마냥 체화되는 경험은 쉽지 않다. 어쩌면 그 순간에서 조차 견고한 거리두기가 가능케 하려는 두려움이 죽음에 관한 몰두를 이끌게 했으려나.
누구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누구는 외면과 혐오를. 어찌하여 라고 물어봤자.


#죽음의부정 #어니스트베커

《죽음의 부정》과 《악으로부터의 도피》에 나타난 베커의 철학은 네 가닥의 끈으로 엮은 매듭이다.
첫 번째 가닥. 세상은 끔찍하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자연에 대한 베커의 해석은 월트 디즈니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어머니 자연은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채 자신의 피조물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암캐다. 베커 말마따나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에서 유기체의 일상적 활동은 “온갖 종류의 이빨로 물어뜯고, 식물의 줄기와 동물의 살과 뼈를 어금니로 짓이기고, 기뻐하며 육질을 게걸스럽게 식도로 내려보내고, 먹이의 정수를 자신의 체제에 통합하고, 그러고나서 악취와 가스를 내뿜으며 잔여물을 배설하”는 것이다.

_서문 일부


Imagine Dragons - Believer ↘♪


어느 회의주의자의 잊히지 않는 어떤 소설에 관한 상념, 새벽의 나나, 박형서 북튜버






어느 회의주의자의
잊히지 않는 어떤 소설에 관한 상념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도 한동안 또는 꽤나 오랫동안 읽은이의 내부에
침잠해 있다가 한번씩, 이를테면 언제 불어올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일어나 읽은이를 소설 속의 거리, 소설 속의 사람들에게 데려간다.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이유가 없다. 소설의 어떤 부분이 자신과 맞닿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 마음속의 얼룩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그 작품을 꺼내 그들의 안부를 묻고 싶거나 그곳의 거리, 거리
가운데 있었던 골목은 잘 있나 돌아보고 싶은 것이다.



『새벽의 나나』를 다시 꺼내든 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과
그곳은 잘 있나 비록 어떤 등장인물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를 확인하고
긴 골목길을 돌아 나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새벽의 나나』는 태국의 나나역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매춘의 거리
소이 식스틴이라는 공간에 관한 소설이랄수도 있으며 최종 목적지를
아프리카로 정하고 여행길에 올랐지만 태국에 머물고 있는 레오가 만난
플로이와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설일 수도, 그 모두에 관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을 덮고 나면 그 모두에 관한 것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사라지면서
남기는 얼룩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을 선명한 무늬처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하려고 이러고 있냐
할 것이다. 소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대신 유난히 옮겨적은 문장이
많았던 소설이기에 그 문장들을 읽고 그 문장들에 대한 답장같은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이번 영상은 보여주기 위해 만든다기 보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몇 년에 한번 들춰볼까말까 하는 책인데도 먼지를
듬뿍 뒤집어 쓰고 있는데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책 몇 권은 다들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 경우라고 해두자.



태국이든 어디든 동남아라곤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딱 한 번, 한
곳을 가본다면 태국으로 날아가 나나역에 내려 서보고 싶지만 막상
티켓을 끊으라면 거기가 아닌 그 반대편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다.
그래야만 소설 『새벽의 나나』가 증발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레오는 15년 전의 그 거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이랄까 이렇게 대본을 쓰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하자면
1부가 가장 뒤쪽에 위치 한다.


지금쯤 성질 급한 누군가는 대강의 줄거리를 찾아보고 있을 것인데,
주인공 레오와 플로이를 비롯 그곳을 스쳐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고
매춘과 매춘부에 관한 소설이네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겉껍질일 뿐이다. 나나역이 가까운 태국 수쿰빗 소이 식스틴이라는
거리의 짧은 일대기라고 해두자.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해두자.


지금 다시 읽는다고 같은 문장을 불러낼까 싶지만 그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 문장들에 심었던 감상들을 만나본다.



그리고 남들은 재미없겠지만 이 소설에는 두 번 반복되는 문장이 두 개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 두 문장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일 수도 있겠다. 정 못찾겠다면 살짝 알려줄 수도 있다.
내가 찾은 건 두 개지만 또 모르지 않겠는가 더 있을지도.




어디론가 가는 건 그곳에 꼭 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_14


여기 지금이 너무나 싫어서 여기만 아니면 지옥이라도 낫겠다는
심정이 들어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은 있었을 것 같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 순간이 그런 사람도 있을 것 같고 전혀 그런
심정을 이해못할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떠나 도착한 곳이 여기와 똑같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옥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여기와 판박이처럼 똑같더라도
당신은 여기를 벗어나는 떠남을 선택할건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을 것인데, 떠난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곳에 간다는데 있지 않고 여기를 벗어난다는 그
움직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매번 똑같은 곳에
당도한다는 걸 알더라도 나는 매번 떠나겠다. 똑같은 곳이라고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같은 곳에 간다해도 일단 한 걸음 한 걸음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으니까. 시시포스 신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일테니까.


우연과 운명은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지만, 레오가
소이 식스틴에서 욘을 만난 건 우연이자 동시에 운명이었다. 45


의미만 놓고 보자면 두 단어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만 그
등이 서로 맞붙어버려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샴쌍둥이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우연과 운명 뒤에 곧잘 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만남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운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라고. 다만 만났을 뿐인 것이라고.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건
운명인가 우연인가? 둘 다 아니다 그냥 우주가 그런 것이다. 그냥
만나는 것이고 그냥 스쳐가고 헤어지는 것일 뿐이다.




믿었다 후회하느니 의심했다 사과하자. 64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종교적 믿음과 같은 절대적 믿음이나 사적인 믿음이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인간만이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후회를 마음 한 곳에 티끌만큼이라도
두지 않고 쓸어낼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일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나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 자신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어떤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거야. 가난하다는 것과 여자라는 건 저주야.
플로이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여자는 이중의 저주를 뒤집어
쓰고 사는 거지. /.../
너와 나는 남자야. 그 저주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거지.
그러니까 이해한다고 말하지 마. 131



여기에서의 키워드는 가난과 여자 또는 남자가 아니라 이해라는
키워드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해라는 낱말은 국어사전
에서 사라져야할 만큼 써서는 안될말이라고 생각한다. 정 써야
한다면 부정적 의미일 때만 쓸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다른 관계에선 몰라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나는 너를 이해
한다는 말만큼 새빨간 거짓말도 없다. 인간은 절대로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온전히 타자의 입장이 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특히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해의 벽은 높고 단단하다. 이해라는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일수록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응, 또 놀러 와. 그건 이별에 붙어 다니는 공연한 소리였다.
의사소통의 7퍼센트만이 언어로 이루어진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또 놀러 와라고 말한 건 7퍼센트뿐이었다. 나머지 93퍼센트는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159



흔히 립 서비스라고들 한다. 상대방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입장이 뻘쯤할까봐 가림막처럼 둘러대는 말. 안해도 되는데
하자니 하나마나한 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것이 립 서비스란
걸 안다. 흘려 듣지만 때론 흘려지지 않고 걸러져 찌꺼기처럼
찜찜하기도 한 말. 그런 빈 말을 남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말하지 않음으로 받는 오해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곧 죽어도 빈 말은 안하겠다는 사람의 진심은 쉽게 발견 되지
않고 곧잘 오해되기 쉽다. 곧 들어도 뻔한 빈 말을 남발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건성으로 대한다. 물론 나 역시 밥 한번 먹자
같은 빈 말을 얼마나 남발했던가 하면 할 말은 없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광은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않기로,
개연성 없는 농담처럼 유쾌하기로, 후에 돌아갈 남루한 진짜
생활을 위 하여 사진첩의 얇은 낭만에 머물러주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다. 173


여행 중의 이동하는 길 위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대거나 시선을
기댈 때 바라보는 창밖의 풍광에 넋이 빠져 멍할 때가 있다. 마냥
이대로 길 위에서 흘러 가기만 했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의 여행자가 되었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풍광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면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대부분의 유혹은
미약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무사 귀가를 안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다. 떠나고 싶었던 만큼 여기로 돌아오고도 싶은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는 귀소의 본능이 낯선 풍경들을 뿌리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내린 뿌리가 병들었거나 뿌리 내려야 할 땅이
너무 척박할 땐 쉼없이 떠나는 것을 상상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 마음이 빼앗겨 그는 여기에 머물고 있지만
부적응자가 된다.



그 자신이 무겁게 가라앉은 연기의 일부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일부로, 한없이 가벼운 대기의 일부로 변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느낌, 그저 세상에 가득한 먼지의 일부로 날아
다니는 느낌,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느낌, 아무래도 좋은 느낌,
우주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붙들어 어디론가 데려가는 느낌,
그곳에서도 역시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래도 좋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318



반복되는 듯한 일상에서 나는 나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역할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그런 반면 여행자가 되는 순간부터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객이 되면 나는 일상의 내가 아니어도 된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행지에서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거나 옷차림이 과감해지는건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런
일탈은 시한부 일탈이다. 길어야 몇 박 며칠 아니면 몇 달 그도
아니면 몇 년. 인생은 여행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인생을 여행
처럼 사는 사람은 흔한 말처럼 흔치만은 않다.
일상을 벗어던지고 이상으로 가는 길 위에 맨발을 얹는 사람만이
진정한 일탈의 여행자라 불릴 수 있다. 몸이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날 때 마음도 풀려나기 쉽다. 물론 일상 속에서 마음의
자유에 도달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의 경지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것과 같은 경지. 감히 말하지만 나를
포함 대부분은 못한다. 그래서 몸을 먼저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나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몸따라 살게 되어 있다.비록 일상에 함몰 되어
나락으로 침몰하는 와중에도 우리 중의 누군가는 쉼없이 이상을
꿈꿀수 있다 =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조금씩 침몰해가는 느낌이었다. 엔진이 멈추었고, 선미는 물에
잠긴 지 오래다. 구하러 오지 않아도 돼. 죽도록 내버려두어도
좋아. 한 가지만, 내가 그곳에 가려고 했다는 것만 기억해줘. 308


기억해 주지 않았으면. 아무도 나를 기억해 주지 않기를 바란다.
바라지 않아도 오래지 않아 아무도 기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딱히 기억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들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가운데 과연 오래 기억될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기억에 남는 일은 과연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일일까.
그렇다고 잊어달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므로
떠날 때는 말없이 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말없이 가야 한다.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건 행복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고, 아직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건 사랑의 여러 단계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 모른다. 309


달구어진 건 식는게 세상 순리다. 또 식어야만 한다. 안 식으면
증발해 버릴테니까. 그런데 자신이 끓고 있어서 뜨거운 상태에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끓어넘쳐 불이 꺼져야 식는다.
물론 말은 쉽다. 나 역시 하루에도 열두 번 천불이 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언어라는 건 몹시 불완전한 체계여서, 아무리 명징한 단어가
있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름다운 긴 털의 눈부신
새하얀 따위의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아야 한다. 심지어 그런
식으로 사전에 존재하는 모든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쳐도,
지향하는 대상 자체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다. 조금 더
가까워질 뿐이다.337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日語說
역시 타당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건
여러 민족들의 언어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언어의 장단점을 통합해 완벽한 언어를 만든다해도 생각이나
마음이라는 추상적이고 무형의 것을 딱딱하고 한정된 언어로
형상화 한다는 것은 허공을 잘라내 육면체를 만들어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끝없이 갈구한다.
특히나 타인으로 부터의 말을 고파한다.
그 말이란 것은 쥐에겐 독인데 쥐약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혼은, 인간은 그 자체로서 각각 하나의 우주다. 같은 태양계라
해서 화성이 지구를 이해할 수는 없다.392

중고서점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한때 지구인들은
화성인이라는 외계인을 문어와 비슷한 모습으로 상상했을만큼
다른 별의 생명체에 대해 이질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렇듯이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별에서 왔다고 할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이건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에 관한 문제다.
남자와 여자 사이만 이해가 안되고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를 해석하려 들고 있을 뿐이다. 외국어 한 문장을
해석해도 제각각이고 심지어 모국어로 대화를 해도 말이
안통한다고 하는데 해석이 낳는 숱한 오류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당히 속이고 속고 있을 뿐이다.



수년 전 지인의 권유에 의해 박형서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새벽의
나나』였다. 잘 썼네 하며 읽고 덮어두었다가 몇 권의 책을 내다 팔 때 함께
딸려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어떤 책은 빌려
읽고 소장해야겠다 싶어 굳이 읽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도 하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오며 이 책을 다시 사서 가지고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다시 펼쳐볼리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어쩌면 수중에 없고 멀리 떨어져야 그리움이 더해지는 것처럼 이 책은 부재해야
더 오래 기억할 그런 책이어야 할 것 같아 끝내 재구매는 하지 않겠지 싶다.


더 많은 문장들이 있겠지만 몇몇 문장들을 불러와 그것과는 상관없는 동문서답식의
말을 해봤다. 어떤 말들이든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런 소설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새벽의 나나는 오히려 내가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진다.
거긴 어떠냐고 여전히 여전하냐고.






소설가 김연수 추천작 루시아 벌린 단편집 - 청소부 매뉴얼 북튜버




소설가 김연수 추천 작가의 단편집. 
사후 11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다.
미국이 극찬한 숨겨진 보석 루시아 벌린


사후에 유명해진다는 것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잡담을 좀 한다.

루시아 벌린을 비롯 많은 예술가들이 생존하는 당대에는 지독하게 무명이다보니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처참한 생활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 한다. 그렇게 죽어간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사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로 재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흐나 카프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고흐는 살아생전에 단 한 점의 작품을 팔았다고 하며, 카프카 역시 유언을 지켜주지 않은 친구 덕분에 오늘날의 카프카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에게 고흐나 카프카가 없다한들 바뀔 건 하나도 없다. 그들을 알았기에 그들이 없었다면 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뿐이다. 사후에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더 많은 예술가들이 살아서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 받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궁금하다. 당대에 인정 받다가 사후에 잊혀지는 것과 당대의 무명을 보상받듯 사후에야 비로소 인정 받고 오래 기억되는 것, 과연 예술가들은 어느 쪽을 택할까. 예술의 예자도 모르지만 나는 당대에 영광을 누리고 자연스레 잊혀지는 쪽을 택하겠다. 나 없는 세상에서 내 작품으로 인정 받아 내 작품이 수억원 하면 뭐하고 전세계인들의 필독서가 되는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 말이다.


최근 이야기 한 리스펙토르나 오늘 이야기 할 루시아 벌린이나 사후에 인정 받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한번 이야기해 봤다.


우선 도대체 이름도 생소한 루시아 벌린이란 작가가 누구냐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루시아 벌린 Lucia Berlin 1936~2004

알래스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여러 광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돌아온 후 칠레의 산티아고로 이주한다. 10살에 척추옆굽음증 진단을 받았고 평생 고통스러운 상태가 따라다녔다.

3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으며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평생 76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향수』(1991) 『안녕』(1993) 『내가 지금 사는 곳』(1999) 과 같은 단편집을 발간했다.

2004년 태어난 날인 11월 12일 사망했다.


지금쯤 이 작가가 또는 이 책은 어떤가 싶어 온라인 서점을 검색해보고 있을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띠지 카피가 눈에 띈다.


“그동안 루시아 벌린을 몰랐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카피긴 하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일단 번역 된다는게 어디냐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원서로 먼저 읽은 어떤 독자는 혼자만 알고 싶은 작가라고 후기를 남겨 놓기도 했다. 그럴 때 원서를 읽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할 때 김연수의 말처럼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말이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 쏟아진 찬사는 실로 휘황찬란하다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런 찬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이제야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모든 매체들이 좀 꼴사나운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그동안 눈 감고 있다가 작가 사후 11년이나 지나서야 온갖 미사어구를 갖다붙이는 건 스스로 책을 알아보는 안목의 어두움을 드러내는건 아닌가 그 말이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평생 쓴 76편 가운데 43편이 소개 된 만큼 나머지 작품들이 소개될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아마 이 책은 입소문을 거치고 거쳐 절판된 후 다시 발간 되기도 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같은 책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좋은 작품집이란 얘기다.


43편 모두를 이야기할 수는 없고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살펴본다.


원제는 자살 유언 쓰기 매뉴얼 인데 바꾼 제목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작가들 자신이 지은 제목보다 출판사에서 지어주는 제목이 대부분의 경우 더 나은 경우를 많이 본다.

제목 그대로 각 가정으로 방문해 청소부 일을 하고 한편으론 수면제를 모으며 보고 느낀 점들과 그 과정에서 얻게 된 노하우 그러니까 청소부 매뉴얼이 소설의 주요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틈새에 살짝살짝 주인공의 이야기를 한두 문장씩 넣은 게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수면에 선명하게 반사되는 풍경이 청소부 이야기 이고 수면 밑으로 희미하게 보일 듯 말듯한 물의 흐름이 한 문장씩 툭툭 들어가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다. 그것을 캐치하여 연결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 문장들을 모아봤다

내가 실제로 훔치는 건 수면제뿐이다. 47p
술 취한 인디언이 이제는 내 얼굴을 익히고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대여, 인생이란 그런 거라오.” 52p
이들의 집에서 일하며 모은 수면제가 이제 서른 알이다. 52p
나는 수면제를 모은다. 57p
테리, 사실 나는 전혀 죽고 싶지 않아. 64p
나는 마침내 울고 만다. 64p


어쩌면 이 문장들을 쓰기 위해 청소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나의 억측일 것이다. 물론 이 문장들 외에 살을 붙인 몇몇 문장들은 시청자들을 위해 꺼내지 않고 남겨둔다. 여러 청소부 이야기들과 이 문장들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와 있다.


소설가 마다 저마다의 전략과 전술이 있을 것이고 각자 특기와 장기가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작가라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루시아 벌린의 전략이랄까 특기는 이런데 있지 않나 싶다.


직접 말하기 방식의 소설이 아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양적으로는 단편의 분량 속에서 여러 장면 장면으로 조합된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가 읽은 다음에 떠오르게 하는 루시아 벌린 이라는 작가를 접할 수 있어 아주 흡족한 독서가 되었다.



소설의 디테일은 경험과 취재에서 올 수 있을텐데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다분히 저자의 경험에서 왔을 것이다. 이를테면 술주정뱅이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단편 ‘모이니핸 치과’에서 살짝 드러나는 것처럼 경험 아니면 쓸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단편 ‘청소부 매뉴얼’의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경험담일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다른 포인트 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그 모습들을 전부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벌린이 사망한 후 네 아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단편들은 실화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자전적이라는 건 아니지만 대충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역자 후기에서 옮긴이는 루시아 벌린과 레이먼드 카버의 작가적 성패를 언급하고 있다. 카버는 당대에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벌린은 사후 11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역자는 카버와 비교를 하며 벌린이 당대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성향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한다. 생전에 벌린은 “자신은 안정된 삶에 저항했다.”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벌린은 일찍이 예술기금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을 받았지만 그 돈을 여행하는데 모두 써버렸고 그후로는 어떤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기질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예감을 불안하게 외면하며 막다른 곳으로 돌진하는 사람들. 불운한 천재들의 특징이다.


루시아 벌린이라는 생소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작가가 이제 막 국내에 소개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벌써 더 이상 씌어지지 않았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설들에 휩쓸려 루시아 벌린이라는 이름을 놓치는 일은 당신이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좀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문지에크리 - 김혜순 -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북튜버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가 출간 되었다. 
그 가운데 김혜순 시인의 산문을 골랐다.
여자, 짐승, 아시아, 하기 의 키워드로 읽어보면 좋은 산문이다.
이 산문을 통하여 김혜순 시인의 시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이기를 바란다.

문지 에크리 시리즈의 간단 소개와 책 소개.






여행생활자 - 유성용,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북튜버



저자 유성용의 티베트와 인도, 스리랑카, 네팔 등 오지와 분쟁지를 떠도는 동안의 감상과 
감정의 글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여행기 아닌 여행기를 읽고 생각한 리뷰가 아닌 상념들이다.



Billie Eilish - idontwannabeyouanymore ↘♪



Don't be that way
Fall apart twice a day
I just wish you could feel what you say
Show, never tell
But I know you too well
Kind of mood that you wish you could sell

If teardrops could be bottled
There'd be swimming pools filled by models
Told a tight dress is what makes you a whore
If "I love you" was a promise 
Would you break it, if you're honest
Tell the mirror what you know she's heard before
I don't wanna be you anymore

Hands. hands getting cold
Losing feeling is getting old
Was I made from a broken mold?
Hurt, I can't shake
We've made every mistake
Only you know the way that I break

If teardrops could be bottled
There'd be swimming pools filled by models
Told a tight dress is what makes you a whore
If "I love you" was a promise
Would you break it, if you're honest
Tell the mirror what you know she's heard before
I don't wanna be you
I don't wanna be you
I don't wanna be you
anymore



소설가 배수아가 반한 소설가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북튜버

보르헤스 보다 뛰어난 브라질 소설가
소설가 배수아가 반해서 번역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의 단편 소설집 달걀과 닭
배수아 작가가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된 이야기




소설가 배수아가 반한 소설가


이 작품집을 안읽기로 했다가 읽기로 한 이유가 있다

안읽어야지 했던 이유는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 저자의 작품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라는 걸 몇 년 전 구해 읽고 아 이 작가는 내 꽈가 아니구나 싶어 밀쳐 놓았었다.

그랬는데 이건 왜 읽었냐 하면

이 책을 먼저 읽고 있던 어느 분의 소개글과 본문 가운데서 따온 문장들에 대한 감상의 영향이 지대했다. 앞에서 읽었던 그 작품과는 뭔가 궤가 다른 작품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번역자가 배수아 작가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긴 했다.

배수아 작가는 자신의 소설 북쪽 거실의 표지 그림을 리스펙토르의 해외 판 표지 화가 그림으로 할 정도로 리스펙토르의 작품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그 사실은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아울러 옮긴이의 말을 읽어나가보자니 좀 더 집중해서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Clarice Lispector (1920 ~ 1977)


1920년 우크라이나 태생 같은 해 브라질로 이민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브라질 북동부에서 보냄

1944년 이탈리아에서 데뷔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로 그라사 아랑냐상을 수상

뒤이어 어둠 속의 사과』 『단편들』 『G.H.에 따른 수난등을 발표

배움 그리고 기쁨의 책들황금돌고래상을 수상

1977년 생전 마지막 소설 별의 시간발표

1977년 생활고와 1967년 화재로 입은 화상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다가 암으로 57세로 사망

삶의 숨결사후에 발표


리스펙토르는 외교관과 결혼했지만 외교관의 아내라는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작가로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다.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현재 브라질에서 여성 카프카라는 타이틀을 달고 현대 브라질 문학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으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 후 귀국했을 당시 대다수 출판사들은

그녀의 작품을 외면했다. 남미문학하면 쉽게 보르헤스를 떠올릴 것이다.

클라리시의 작품을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 소개한 엘리자베스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탁월하게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번역한 배수아 작가의 리스펙토르 작품에 대한 간략한 평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부조리와 돌연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글은

구조나 플롯으로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받은 느낌은,

전체 이야기가 하나의 덩어리로, 한꺼번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하는 작가, 오해받는 작가였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클라리시가 죽기 직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별의 시간에는,


이글은 (독자들이)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작가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진술이 나온다.

내게는 그 말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글쓰기의 핵심처럼 들렸다.


단 몇 줄의 설명으로 감이 올지 모르겠으나 어떤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아 이 작가는 내 꽈구나, 또는 내 꽈가 아니구나 하는.


이 단편집에는 26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을 보자면 '달걀과 닭'이 대표 단편으로 작가 역시 인정한 모양이다. 리스펙토르 생애 단 한 번 있었고 사후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그는 표제작 달걀과 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 중에서 나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게 달걀과 닭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말을 듣고 금방 떠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작가 본인이 써놓고 작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무슨 궤변이냐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대표작일 수가 있느냐 할 것이다.


옮긴이 배수아는

'달걀과 닭'은 희게 번득이는 빛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칼날에 베이는 것을 사랑한다. 라고 했다.


'달걀과 닭'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그러면 닭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달걀은 닭의 위대한 희생이다.

달걀은 닭이 일생 동안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이다. 달걀은 닭이 영원히 닿지 못할 꿈이다. 닭은 달걀을 사랑한다. 그러나 달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스스로 조심하게 될까?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닭으로서의 상태를 상실해버린다. 닭으로 존재함은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은 구원이다. 왜냐하면 삶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삶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기에. 그러므로 닭이 할 일이란, 오직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존이란, 죽음으로 이르는 삶에 대항하여 투쟁을 유지하는 것이다. 닭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닭은 우울해 보인다.

12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 역시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에 실린 26편의 단편들이 모두 '달걀과 닭'과 같을까? 감히 말하자면 나는 표제작인 '달걀과 닭' 이 한 편을 예외작으로 놓고 싶다. 이 한편 때문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를 리스트에서 지워버리는 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를 모두 읽고 남겨 두던가 아니면 대~충 읽어도 괜찮다고 본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

시각의 먼 끝에는 풍경이 있으며, 손가락의 끝에는 사물이 있다-그곳으로 나는 간다.


나의 머나먼 끝에 내가 있다.

, 애원하는, 궁핍을 겪는 나, 매달리고, 통곡하고, 한탄하는 나.

294


다소 시적인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그곳으로 나는 간다 와 같은 작품은 단 두 페이지에 불과 하다. 이처럼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표제작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우화스럽기도 한 이라는 작품에서도 리스펙토르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고 본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로 좀 빠져서, 배수아 작가가 어떻게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되었나 하는 장면을 요약해서 옮겨와 본다.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했을 때,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내게 건네졌다.

G.H.에 따른 수난

열 페이지 정도를 읽을 때까지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얼마나 기이한 제목인가,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얼마나 기이한 문장들인가.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 없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 목소리인가. 그리고 고백하자면, 열 페이지 정도를 넘길 때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지 머뭇거리는 상태였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은 내 의식에 가장 깊게 달라붙은 책 중의 하나로 내게 어둡고도 둔중한 충격이었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 카프카 이래로 가장 신비한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리스펙토르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포르투갈어 교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신은 G.H.에 따른 수난을 네 번이나 읽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열일곱 살 난 소녀가 왔다. 소녀는 G.H.에 따른 수난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배수아 작가의 팬이 아니라도 이렇게 설명되어지는 작품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의 감각이 반짝하지 않나? 하지만 나 역시 힘주어 말해지고 있는 기이하다는 표현에 한편으론 달걀과 닭을 떠올리며 안읽을게 뻔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책을 들춰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번역 출간 된다니 한번 기다려 확인해 볼만한 일이다. 어쨌든 참 궁금하기는 하다.

제발트 번역을 통해 국내에 제발디언 바람을 일으켰던 배수아 작가가 이번에는 리스펙토르 바람을 불러일으킬지 흥미롭다.


참고로 리스펙토르 생애에 단 한번 19772, 상파울루 TV 와의 텔레비전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주소를 올려 놓았다. 이 인터뷰는 작가의 부탁대로 사후에 공개 되었다.


https://youtu.be/ohHP1l2EVnU


리스펙토르는 자신의 글에 대해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종류든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라고 했다.

저자의 말과 같이 리스펙토르를 당신이 읽는다면 일반적인 독서를 통해 얻게 되는 만족감 같은 건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론 독서를 통해 불만족 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경험이 오히려 더 즐겁지 아니한가 한다면 이상한 놈이 되려나.


여하튼 뭔가 이야길 하긴 한 것 같은데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낯설기만 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의 소개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하빈재 신동재 한티재 R


1 2 3 4 5 6 7 8 9 10 다음